[만남] 사뿐사뿐, 그리고 힘차게 / 김리회(Kim Lihoe),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그때는 알았을까. 발레가 나를 찾아와 지금껏 함께하고 있을 거라는 것을. 한 마리 나비가 바쁜 날갯짓으로 봄을 유영하듯, 나는 나만의 몸짓 언어로 무대 위의 인생을 거닐고 있다. 잠시 뒤돌아 그 시간의 뜰에 들어가 보면, 발레를 통해 앞으로 나아간 삶의 한 장 한 장이, 수많은 만남이 머물고 있다. 처음 토슈즈를 신고 무게중심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어린 시절부터 첫 무대의 떨림, 그리고 최근에 선 무대의 설렘까지 수없이 넘어지고 날아오른 순간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아마도 5살 때였을 것이다. 엄마 손을 잡고 처음 발레 학원을 찾아갔던 때가. 유치원 선생님은 내가 유난히 율동을 잘 따라 한다며 발레를 권하셨고, 엄마는 그 한마디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셨다. 엄마 역시 어린 시절 발레를 하신 경험은 있었지만, 이후 나처럼 계속하지는 못하셨다고 한다. 아마도 이로 인한 아쉬움과 간접적으로나마 발레와 재회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어떤 기분 좋은 확신으로 합쳐져 나를 이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주신 것은 아닐까 싶다.

그때부터 나는 마냥 발레가 좋았다. 어린 마음에 핑크빛 부드러운 감촉의 발레복을 입고 율동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고, 모든 것이 즐겁기만 했다. 다른 것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에게 발레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으니 말이다. 그냥 좋은 게 이런 거구나를 몸소 체감한 것이다. 물론 수면 위에 떠있는 백조의 우아한 모습은 수면 아래에서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하는 백조의 발에 의해 가능했듯이, 그저 예쁘게만 보였던 발레는 나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나를 가슴 뛰고 설레게 하는 삶 그 자체가 되었다.

이후 나의 평범한 일상은 모두 발레에 맞춰졌고, 이를 통해 삶의 지도도 완성되어갔다. 새롭게 재편된 삶 속에서 발레는 유일한 내 친구였다. 중학교 졸업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교육원에 조기 입학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더욱 내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기 힘들었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과 발레 외에는 특별히 소통할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 오로지 발레가 일상의 전부였고, 발레를 통해 인생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 어땠어?” 나는 든든한 지원군인 남편에게 무대를 마치고 나서 늘 이렇게 묻곤 한다. 한 명의 철저한 비평가이자 관객인 남편은 예리한 눈빛으로 공연 후기를 들려준다. 같은 학교에서 현대 무용을 전공한 남편은 누구보다 무용수들의 몸 상태와 무대를 잘 알고 있어서 나에게 늘 최대한 무대에서 빛날 수 있는 순간까지 머물기를 바란다며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자신의 꿈을 대신 이루고 있는 것 같아서 기쁘다고도 했다. 이처럼 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더 멀리,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었다.

결혼에 이어 출산은 내 삶을 더 풍요롭고 따뜻하게 만들어줬다. 그간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면서 어제보다 성장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나를 중심에 놓고 발레를 했다면 지금은 내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심정으로 생각의 초점이 바뀌었다. 가족의 따뜻한 배려와 관심이 없었다면 온전히 발레에만 집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삶의 크고 작은 변화들은 피할 수 없었다. 출산 후 급격한 몸의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출산 2주 전까지도 토슈즈를 신을 만큼 별다른 문제가 없었는데, 근육의 예민한 감각들이 둔해지고 컵도 들지 못할 정도로 기운도 없어졌다. 마치 신생아가 되어버린 것처럼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나의 일상생활은 늘 벽 앞에 선 듯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아이를 안으면서까지 근력 운동을 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예전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마 그때 바로잡지 못하고 무너졌다면 회복 가능성은 극히 낮았을 것이다. 그런 심리적·물리적 변화를 겪어서인지 요즘 더욱 발레가 간절해진다.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된 순간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강수진 단장님처럼 오랜 세월 현역으로 남고 싶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렇듯 매 순간 동기 부여가 생기면서 문득 5살 때 처음 발레 학원에서 바를 잡고 연습하던 시절이 아련하면서도 뜨거운 감정으로 밀려왔다.

아름다운 몸짓 언어로 관객과 소통하는 발레는 동작 하나하나를 이어가며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매력이 있다. 사실 어릴 때는 기술적인 부분을 소화하느라 다른 것들을 간과했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낮 공연과 저녁 공연, 어제와 오늘 공연이 다르듯, 발레는 무대 위에서 한순간 불꽃처럼 타오르다 사라지는 속성 때문에 더 간절하고 아름답다.

과연 다시 무대와 만날 수 있을까.’ 출산 후 슬럼프를 겪으며 항상 되뇌던 말이다. 이후 감사하게도 나는 어릴 적 처음으로 보았던 <백조의 호수>로 무대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오늘,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연습실로 향하고 있다. 사뿐사뿐, 그리고 힘차게.

* 1987년 출생. 선화예술학교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11회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 시니어부분 은상(2009), 11회 아라베스크 콩쿠르 베스트 커플상(2010) 등 다수 수상.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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