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1,000억분의 1 / 윤소희, 배우

배우가 되고 싶다 생각하고 나서부터 나는 지식이나 사실, 의견을 제시할 법한 책들을 의식적으로 멀리해왔다. 독서를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궁금증도 많은 편이라 사람들은 나에게 주로 감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소설이나 시를 권했다. 그런 얘기를 몇 번쯤 듣고 난 후 어느 날, 나는 서점의 스테디셀러 섹션에서 왠지 일러스트가 끌리는 책을 발견했다. 바로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책들이었다. 저자에 대해 들어본 적도 있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 책을 구입하고 집에서 읽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전이라 내용은 거의 잊어버렸지만, 처음 읽었을 때부터 선명히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이 사용해 와서 내 마음과 클릭되는 부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책 속의 주인공에게 적절한 표현이 떠오른다. 갑자기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기보다는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 내가 클로이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너를 마시멜로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말 중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정확히 하려고 책을 보고 그대로 옮겼다. 나는 책 내용을 잘 잊어버리는 편인데, 이 부분은 책 페이지상 위치까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처음으로 저자에게 동감했고, 이런 저자를 찾았다는 즐거움이 생긴 덕에 이후의 독서는 어렵지만 설레는 일이 되었다. 나에게도 마시멜로한다와 같은 단어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로망과 함께.

그러다 최근 나에게도 마시멜로한다가 생겼다. 작년 말 갑작스럽게 <요즘책방-책읽어드립니다>라는 TV프로그램 제안을 받았다. 일이라는 좋은 핑계로 다양한 분야의 책들과 만날 수 있으니 바로 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만남도 행운인데, 예전부터 팬이었던 김상욱 교수님께서 자주 출연하신다는 말을 듣고 연말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첫 녹화 때 다룬 책은 <이기적 유전자>, 김상욱, 장대익 교수님께서 출연하셨다. 녹화가 시작되고 오프닝이 진행되던 때 불쑥 김상욱 교수님께서 급하게 대기실에서 계산을 해봤어요라고 말문을 여셨다. 5,000만 국민 중 카이스트 동문이 18,000명인데, 그중 3명이 우연히 한자리에서 만나게 될 확률을 계산해보니 1,000억분의 1이라고 하셨다. 이는 로또 1등에 당첨이 되고, 주사위 5개를 던졌는데 전부 1이 나올 확률이라고.

그날 밤 자려고 누웠을 때 ‘1,000억분의 1’이라는 수와 로또 1등에 당첨되고 주사위 5개를 던져 전부 1이 나올 확률이라는 설명이 음성지원까지 되며 계속 떠올랐다. 내가 한 어떤 경험을 이렇게 확률로 계산해 수치적 개념을 갖게 된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소중한 숫자이자 경험, 뭐라고 단정 짓지 못할 무언가가 되었다. 나에게 ‘1,000억분의 1’마시멜로한다와 같은 표현으로, ‘1,000억분의 1’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몽글몽글한 감정이 생긴다. 그날 이후 나는 ‘1,000분의 1’에 대한 이야기를 지인들에게 자랑하며 들려주었다.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생각하면 좋은 일이라서 공유하고 싶었다.

살다 보면 우리는 와 세상 참 좁다 어떻게 이렇게 만나지? 어떻게 이렇게 인연이 됐지?’ 하는 일들을 겪게 된다. 예상치 못하게 연락이 닿은 친구들도 있고, 처음 만난 순간 왠지 끌려서 친구가 되어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친해지기도 한다. 이런 일들을 확률로 계산해 수치로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내가 그날 ‘1,000억분의 1’의 확률로 겪은 일보다 더 낮은 확률로 일어날 법한 일을 겪은 적이 더 많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들의 삶에는 여기저기 우연의 산물들이 존재한다.

어릴 때부터 TV에 로또 당첨 사연이 나오거나 누군가 그런 얘기를 할 때면 와 로또 1등은 어떻게 당첨되는 거지? 이번 생에 가능은 할까?’라고 생각했다. 이과생이다 보니 학창 시절 재미로 확률을 계산해보긴 했지만 일상과 연관 지어본 적은 없다. 그런데 그날 이후, 소중한 사람들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은 로또 1등에 당첨되고도 주사위 다섯 개를 굴려 동시에 모두 1이 나올 확률보다 적다는 것을 재차 깨달았다. 그런데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내가 더 행운의 주인공처럼 느껴져 순간 뿌듯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가족들은 감히 수치로도 표현할 수 없는 확률로 내 주변에 있다. 어린 시절 이라는 노래 가사를 보며 나도 누군가에가 그런 사람이고 싶고, 그런 사람을 찾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적어도 ‘One in a quadrillion’ 또는 ‘One in a zillion’의 확률로 만난 사람을 곁에 두고 있다. 굉장히 진부하지만, One in a million이 되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는데, 우리 모두는 이미 주변 사람들에게 그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존재이다.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만남은 많은 것을 배우게 한다. 아무리 편견 없이 한다고 해도 내 세상 안에서 그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책도 마찬가지이다. 내 입맛에 맞는 책이나 저자의 책을 더 선호한다. 하지만 책과는 논쟁을 하게 되지 않으니 마음에 들지 않았던 책이라도 나중에 보면 의외로 나랑 잘 맞기도 한다. 그만큼 책은 오래 볼수록 좋은 친구이다. 내가 버리지 않는 한 나를 떠나지도 않는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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