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사뿐사뿐, 그리고 힘차게 / 김리회(Kim Lihoe),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낯익은 이름 뒤로 숫자가 찍혀 있었다. 이름과 색깔이 달라서인지 유독 도드라진 그 숫자에는 다급함과 짜증이 엉켜있었다. 낯익은 이름 위로 손끝을 갖다 댔다. 운동 중이라 전화를 못 받았다는 말을 끊으며 그 이름은 서둘러 말했다. 만나자고, 어디라도 좋으니 지금 당장 만나자고.

부장이 된 PD는 라디오 진행을 맡아달라고 했다. 그 프로그램이었다. 부장 PD와 내가 막내 PD와 고정 출연자로 인연을 맺은 프로그램이었다. 종가 고택 같다고나 할까? 한때는 문지방이 닳을 정도로 영화를 누렸으나 이제는 처마 밑으로 적막감마저 감도는 프로그램이었다.

만남은 낯섦과의 조우를 뜻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늘 갑작스럽게 오고 혼란스럽게 온다. <시선집중>과의 만남도 그랬다. <시선집중>이 생기기 1년 전, 단출한 이슈에 대한 단발성 해설을 부탁 받고는 전화 인터뷰에 응했다. 10분간의 인터뷰를 건성으로 끝마치고 토막 난 새벽잠을 이어 붙이려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메인 PD였다. 매일 고정 출연해보지 않겠냐고 떠보는 것이었다. 찰나의 머뭇거림도 없이 노 땡큐라고 대답했다. 음주 취재에 절어 사는 30대 초반의 기자가 매일 새벽 꿀잠을 포기하는 건 고역이었다. PD는 굴하지 않았다. 넌지시 출연료를 말하며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권했다.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삶의 논리가 낯섦에 대한 경계심을 해제해버렸다. 새벽 꿀잠이 아무리 달콤하기로서니 생후 10개월 된 아이의 분유통 무게를 이기긴 힘들었다. 꼬박 1년 동안 마이크 앞에서 뉴스를 추려 전했고, 1년 뒤 <시선집중>이 생길 때도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합류해 뉴스를 추려 전했다. 그렇게 11년 반의 동행이 이어졌다.

낯섦과의 조우는 종종 뜻밖의 결과를 빚어낸다. 익숙한 타성과 낯선 긴장이 버무려져 전혀 다른 질의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나에겐 그랬다. <시선집중>과의 동행이 사고법과 소통법을 바꿔놓았다.

마이크과 달랐다. ‘은 독백과 같은 것, 나의 정보와 생각을 정해진 규격에 맞춰 풀어내면 그만이었다. 그 규격을 논리라고 폼 나게 불러도 다를 건 없었다. 그건 풀어내는 나의 논리였지 보는 사람들의 논리는 아니었다. ‘마이크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대화였다. 스튜디오에서 벽을 보고 얘기를 해도 그건 대화였다. 상대의 관심과 감성을 알지 못하고선 이야기를 풀어낼 수 없었다. 육하원칙에 따라 피라미드형으로 구조화된 기사를 해체해야 했다. 정보를 흐르는 물처럼 풀어야 했고, 무미건조한 어휘에 감성을 입혀야 했다. 그렇게 조금씩 변해갔다. ‘글쟁이에서 말쟁이로 활동의 중심축을 옮겨가면서 의 차이를 알아갔고, 말은 소통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소통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헤어짐은 급작스럽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고 방송사 분위기가 바뀌고 여러 프로그램 진행자의 얼굴마저 바뀌는 걸 보면서 예감하고 있었다. 다음은 내 차례일 거라고. 방송 하차를 통보하는 PD의 말 떨림을 진정시키며 짐을 쌌다. 홀가분하기도 했다. 세상이 한 번 바뀌는 동안 낯선 긴장은 오간 데 없어지고 익숙한 타성만이 몸과 마음 모두를 휘감는 걸 자각하고 있었기에 억울할 것도 없었다. 몇 달 전부터 회자정리(會者定離)’를 되뇌고 있던 터였다.

그 이름 그대로이고, 그 시그널 그대로인데도 다시 낯설다. 아니, 더 낯설다. 8년 만에 돌아와 마이크 앞에 선 심경은 방송을 처음 시작하던 20년 전의 그때보다 더 혼란스럽다.

때로는 재회의 이질감이 첫 만남의 그것보다 크다. 고정관념화 된 기억은 옛것 그대로의 재현을 소망하지만 그건 헛된 바람이다.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를 밀어낸다. 세상은 쪼개졌고, 청취자는 화가 나 있다. 미디어는 넘쳐나고 청취자의 선택지는 많다. 나는 여전히 진동한다. 과거의 엄격함과 지금의 발랄함 사이에서, 과거의 엄정함과 지금의 선명함 사이에서, 과거의 옳음과 지금의 좋음 사이에서 끝없이 진동한다. 과거의 원칙이 지금의 추세를 멸시하고, 지금의 추세가 과거의 원칙을 비웃는 와중에서 끝없이 진동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진자운동을 한다. 익숙한 타성과 낯선 긴장 사이를 끝없이 오간다.

열이 난다. 익숙한 타성과 낯선 긴장이 분자운동을 하면서 머리에서 열이 난다. 딱딱하게 굳었던 머리가 흐늘거리는 액체 상태를 넘어 이제는 조금씩 김을 뿜어낸다. 알 길이 없다. 이 기화 조짐이 휘발의 초기 징후인지, 승화의 초입 현상인지 알 길이 없다. 아직은 진동을 멈출 때가 아닌가 보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MBC

 

 

*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미디어오늘 편집국 국장(1998~2001). tbs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2016~19), MBC <김종배의 시선집중>(2019~) 진행. 저서로는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30대 정치학>(2012) .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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