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내 삶에 임하는 경건함 / 김성경, 방송인·아나운서

48년 전 우리 엄마는 한없이 우셨다. 그날은 온 가족·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인 설날이었다. 예정일보다 빨리 온 진통으로 긴장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꼭 아들일 거라 본인은 물론 주위 사람들 모두 믿고 기대하던 터라 엄마는 당당하게 병원을 향했다. 그런데 결과는 또 딸. 태어난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마는 보수적인 경상도 집에 시집온 엄마 입장에서는 아이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때 아빠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단다. 병실 방바닥에 양 무릎을 세우고 앉아 두 팔을 무릎 위에 얹고 그사이에 머리를 축 늘어뜨린 채 한숨을 쉬던 그 모습이.

나는 그렇게 모두의 실망 속에서 태어났다. 태몽이며 배 모양으로 볼 때 영락없는 아들인지라 오히려 엄마 뱃속에서 더 호강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 얘기는 철들고 한참 후에 들었지 한 번도 딸로 태어나서 불평등을 겪거나 홀대받은 경험은 없다. 돌아가신 친할머니가 간혹 나를 쓰다듬으며 “에구, 네가 뭘 하나 달고 나왔어야 하는데” 하신 기억밖에는. 

우리 아빠는 딸 셋의 아버지셨다. 테니스와 등산을 좋아하고 카메라와 전축 같은 오디오 기기 사는 것을 즐기는 나름 얼리어답터였으며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호인이셨다. 그런 아빠가 올해 4월에 돌아가셨다. 아빠는 보수적인 유교 전통을 신봉하는 무뚝뚝하고 고집 센 분이셨다. 그런 분에게 아들이 없다는 사실은 위축되게 만드는 부분이었지만 한 번도 내색한 적 없으셨다. 내가 태어난 날 실망감을 감추지 않으셨더라도 내가 자라는 모습에 “얘를 안 낳았음 어쩔 뻔했어” 하시며 늘 볼 뽀뽀와 수염 난 턱을 비비는 애정 표현을 빠트리지 않으셨던 분, 무릎에 앉아 ‘토끼와 거북이’ 얘기를 신나게 떠드는 막내딸을 흐뭇하게 바라보셨던 분, 엄마와 언니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여자 넷이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면 말없이 과일을 깎아 조용히 건네셨던 분, 아나운서가 된 딸을 위해 차 사는 데 보태라며 얼마 되지 않는 공무원 월급에서 돈을 모아 선물로 주신 분.

하지만 나는 그런 아빠에게 불만이 있었고 창피해했으며 아픔을 드렸다. 왜 다른 아빠처럼 다정하고 조곤조곤한 대화를 많이 하지 않는지, 왜 우리집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풍족하지 않은지, 왜 한 번 고집 피우면 꺾질 않으시는지…. 학창 시절 선생님들은 늘 내게 물었다. “아버지 뭐 하시는 분이니?”라고. 선생님 눈에는 내가 꽤 부잣집 딸로 보였는지 아빠가 재력가라면 학부모 임원을 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공무원이신데요” 하면 늘 돌아오는 실망스러운 눈빛. ‘아빠가 좀만 더 잘나갔으면 학교에서 더 인정받을 수 있었을 텐데’라고 철없던 나는 한참 동안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아빠의 참모습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필요했다. 취업, 결혼, 출산, 그리고 이혼까지. 삶의 질곡을 경험한 후에야 가능했으니 말이다. 33년생이신 아빠가 유수의 국립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수십 년간 욕심 없이 청렴한 공무원 생활을 이어오셨다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지, 30년 가까이 사회생활을 하고 나서 깨닫게 된 것이다. 게다가 아빠가 꽤 로맨티스트였다는 사실은 부부간의 미운 정이 다 사라지고 난 후 엄마를 통해 알게 되었다. “모임에서 당신이 최고더라”라는 말도 자주 하셨고, 병치레가 잦아서 여느 아내들만큼 내조하지 못한 엄마에게 싫은 내색 없이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아이들 잘 키워줘서 고맙다”, “당신이랑 사는 동안 행복했다” 하셨다고 하니. 

막내딸이 힘겹게 이혼 결정을 알렸을 때 아빠는 충격으로 거의 한 달 이상 식음을 전폐하셨다고 한다. 나는 내 고통만 생각했지 아빠의 아픔은 짐작하지 못했는데, 내심 사위를 용서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내 앞날이 걱정되기도, 사위에 대한 원망도 컸겠지만, 아들이 없다 보니 여자들은 받아들일 순 없어도 남자들끼리는 이해할 수 있는 고충을 늘 홀로 삭이셨던 것이다. 

아빠는 올 초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가 기적적으로 호전되어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런데 그때 나는 또다시 실수를 저질렀다. 그 상태로 오래 계실 줄 알았던 것이다. 야윈 모습으로 힘겹게 생활했던 아빠는 엄마에게 그동안 못다 한 감사와 애정을 표현하고 딸들에게 삶의 태도에 대한 진심 어린 당부를 전하고는 한 달 만에 병이 재발하여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리석은 딸이 아빠의 사랑을 다 깨닫기도 전에, 깊은 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다정한 막내딸의 모습도 보여드리지 못하고 감사함과 존경을 표현도 못 했는데 아빠는 그렇게 가셨다. 

‘내리사랑’이라고 부모 자식 간의 만남은 늘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일방적인 사랑이 크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 점점 더 깨달아야 한다. 부모의 삶과 사랑을. 그것이 내 삶에 임하는 경건함임을. 나에게 아빠가 남긴 카세트테이프가 있다. 74년도에 새로 산 녹음기를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선보이며 우리 어릴 때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목소리까지 담은 것이다. 물론 짧지만 아빠의 젊었을 때 목소리도 담겨있다. 그것을 들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예쁜 자식들 모습만 열심히 녹음·녹화하지 말고 하루라도 젊은 부모님 목소리의 모습도 담아두라고. 

*1972년 서울 출생. 홍익대학교 교육학 학사, 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석사. 前 SBS 아나운서(1993~2002). 現 TV조선 강적들 진행.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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